누군가에게 매여있을 수 없는 삶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 달이 되리라 결정해서, 가까이 다가선다면, 혹은 더 멀어진다면. 달과의 인력으로 범람하는 바다처럼, 상처를 남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다는 건 결국 한 사람만을 위할 수 없다는 뜻이다. 특별한 존재를 만든다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도, 나도, 내가 지키려 한 많은 사람들도. 모두가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 잘 알고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누군가를 깊게 사랑해 버리면 곧 누군가를 포기하게 된다.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었다. 태양이여, 내 눈을 멀게 하렴.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지 않도록.*
영은 눈 앞에 잠든 청명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창가에서 비쳐 들어오는 옅은 달빛이 명의 흰머리를 더 반짝거리게 만들면, 영은 언제나 그랬듯 그가 흰 꽃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또는 별이라던가. 어쩌면 천사일 수도 있겠다. 명의 얼굴을 가리며 쏟아지는 옆머리들을 뒤로 넘겨주며 영은 그렇게 중얼거린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숨을 쉰다는 건 살아있다는 가장 선명한 증거. 공기를 들이마시고, 또 내쉬고. 심장은 그렇게 끈질긴 박동을 이어간다. 영은 청명이 아직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뻤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다는 것에 기뻐하지 않을 존재는 세상에 없겠지만, 영은 언젠가 끝날 이 행복이 아직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퍽 기뻤다.
청명은 작고, 또 사랑스럽다. 키는 저보다 반절 정도는 작고, 덩치 역시 자그마하다. 손도, 발도, 참 작고 예쁘다. 영은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흉터가 많고, 잔뜩 트고 굳은살이 진 손.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렸지만 누가보아도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손이다. 그런 자신의 손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바라보고 있을수록 그저 분명히 찾아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영은 언제든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 공장에 남은 날로부터 늘 그랬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언젠가 반드시 죽고야 말 사람이었다. 영은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생명을 다 바치기로 결정한 일이다. 자신이 없어도 저의 달이 스스로 버텨낼 수 있을거라 믿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은영이라는 사람이 없어도 괜찮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돈이 많지도 않았으며, 대단한 직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뒷골목 어딘가, 가로등조차 고장이 나는 깊은 곳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니까. 세상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은 언제던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달은 오직 밤 만을 밝히는 법이니까, 그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너는. 영은 청명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너는 내가 없다면? 어느 날 나타난 갑작스러운 이레귤러. 이것도 저 책장 너머, 우리를 활자로만 바라볼 그들의 의도라는 건 알고있다. 그러니 너는 따지자면 하나의 버그였다. 그래서인지 내게 언제나처럼의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존재였다. 모두에게 건네었던 다정과 사랑에서 네가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너는 눈을 뗄 수 없는 존재다. 너는 늘 불안정해 보였고, 가끔은 두려워 보였다.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은 청명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갔다. 적정거리, 그가 상처받지 않고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사랑. 그 기준을 넘어버렸어. 너한테 사랑받고 싶어졌어. 깊이 연관되고 많은 것을 나눌수록 서로는 필수불가결의 존재가 되어간다. 영은 저를 바라보는 청명의 눈에서 자주 달빛을 읽었다.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네 사랑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사랑받는다는 건 언제까지고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결국에 영은 바랐다. 네가 언젠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인생에는 끝이 정해져 있으니까, 언젠가 네가 나를 잊어버리면 좋겠어. 네가 나로 인해 무너진다면, 나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상실이 두려웠다.
또한 알고있다. 너 역시 나의 상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영은 몸에 힘을 풀고 누웠다. 머리에 닿는 베개가 익숙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잠을 청하는 것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의 품 안에서 색색 숨을 내쉬는 존재도. 제발, 명아. 내가 자꾸 널 사랑하게 만들지 말아 줘. 그런 실없는 부탁을 허공 중에 날릴 정도로. 네가 있으면 나는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누군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기에. 너로 인해, 나조차도 놓을 수 없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가.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영은 살짝 웃으며 마지막으로 눈꺼풀에 실린 힘 역시 서서히 놓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이미 틀렸는데. 아직은 찾아오지 않은 폭풍에 잠시 감사할 뿐이었다. 세상은 늘 인간을 시험한다. 끔찍한 고통에 우리를 던지고, 일어설 수 있는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려 할테다. 그날이 또다시 찾아오더라도, 어느 것도 놓을 수 없는 것이 너로 인해 찾아올 나의 운명이라면. 어쩌겠나, 받아들여야지. 나의 달맞이꽃을 위해, 영원토록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이 되어주겠노라 맹세해야지. 영은 잠든 명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 까지 지켜줄 테니. 너는 부디, 행복해야 한단다. 흩어져 들어오는 달빛에 빛나는 너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 류시화 -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中
** 류시화 - 나비 中